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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 (book)

[책읽기] 두번째 지구는 없다_2

by 댄싱펜 2020.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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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지구는 없다.

타일러 라쉬

 

1부 모두가 파산을 앞두고 있습니다.

1장 채무자는 인간

 

 

<기후위기, 한국에 100억 달러 손실 안긴다>
기업이 환경을 보호해야 하고 후손들이 살아갈 몫의 생태계를 보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질적인 방법이 없다는 비판도 있을 수 있지만, 기업의 사회적 역할에 환경을 연결하는 언급은 상당히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크게 보면 정부, 기업, 우리라는 세 가지 주체가 있다.

주체이자 동시에 사용자의 입장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리고 누구에게 더 큰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쓸데없는 논쟁 없이.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

그 노력의 방법과 솔루션은 각자의 입장과 역할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특히 기업의 경우, 그들의 책임을 소비자에게 전가해서는 안된다.

내가 생각하는 기업의 책임 전가는 크게 두 가지 정도 있을 것 같다.

첫 번째, 환경, 친환경, 유기농 등..이라는 텍스트에 너무 많은 가격의 부담을 소비자에게 쥐어준다.

왜 그 기업의 노력에 대한 것을 소비자가 부담해야 하는가?

소비자의 입장에서 환경에 좋은 제품과 그렇지 않은 제품을 선택함에 가격이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지구, 환경이라는 하나의 목적을 두고 동일한, 적어도 비슷한 조건을 두고 비교분석이 되어야 할 것이다.

두 번째, 왜 소비자에게 죄책감을 전가하는가?

기업은 그들의 이익만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플라스틱이건 비닐이건 마구 찍어낸다.

신나게 찍어내고 이익은 그들이 갖는데, 제품을 살 때 수많은 포장을 함께 사는 것도 소비자의 몫이고

사용 후, 제대로 재활용하고 버리는 등 뒷처리는 모두 소비자의 몫이지 않은가.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소비자는 소비라는 것에 대해서 죄책감을 가지는 것이 맞다.

소비, 사고 버림에 있어서 불편하거나 선택권 자체가 잘 주어지지 않는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2장 다가올 미래는 예전과 같지 않다.

<우리는 너무 작다는 말>
기후위기는 상대적인 문제가 아니라 절대적인 문제이다. 기후위기는 국경에 국한되지 않는다. 가해자, 동조자, 관찰자에 구분을 두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모두가 피해자가 될 뿐.
지구 생태용량 초과의 날 Earth Overshoot Day이라는 게 있다. 인류가 지구 자원을 사용한 양과 배출한 폐기물 규모가 지구의 생산 능력과 자정 능력을 초과하는 날이다. 지구 생태용량 초과의 날은 인류가 그해에 주어진 생태 자원을 그날까지 모두 사용했다는 걸, 이후부터 연말까지는 미래 세대가 사용할 몫을 가져다 쓰는 셈이라는 것을 뜻한다.
지구 생태용량 초과의 날은 2016년 8월8일, 2019년은 7월 29일로 점점 앞당겨지고 있다. 2019년 기준으로 한국은 4월 10일로 다른 나라의 수준을 훨씬 웃돈다. 전 세계 모든 사람이 한국 사람들처럼 먹고, 입고, 에너지를 사용한다면 1년 동안 3.7개의 지구를 사용하게 되는 셈이다. 전 세계 평균이 1.75개로, 이것은 곧 한국에 사는 사람들이 세계 평균보다 2배 이상 환경 파괴에 참여하고 있다는 뜻이다.

 

 

작지만 강한나라, 세계 속에서 그 존재감이 뚜렷한 나라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우리나라를 그렇게 바라보고 있다.

득이 될때는 세계 몇 위라며 으스대기도 하고, 지표를 들먹이며 상위에 포지셔닝하고 있다고 잘났다고 말한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라면 크게 얘기하려 하지 않는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환경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지구 생태용량 초과의 날이란 것이 있는데, 한국은 세계 평균을 훨씬 웃돈다.

그만큼 우리가 지구를 더욱 마구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작은 나라라는 말로 이를 덮으려 해서는 안된다.

코로나 19 방역처럼(지금 다시 마구 쏟아지고 있긴 하지만..) 세계에서 마음껏 뽐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환경이라는 지금 세계 최대의 공통적인 난제를 가지고 말이다.

 

 

 

<분리수거만 잘하면 충분할까>
분리수거, 분리배출, 전기를 아껴 쓰는 것, 기본이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것이 어떤 시스템 속에 있는 것인지 확인하고, 그 시스템이 지속 가능한 구조인가를 따져야 한다.
조금이라도 거기에 가까워진 것이라면 생각해보는 것이다. 완벽할 수는 없다. 완벽한 것도 필요 없다. 다만 깨어 있고 그 방향으로 계속 가는 게 중요하다.

이것만으로 충분치 않다고 하면..맞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또한 충격적(?)이다. 우리가 이거 말고 뭘 더 어찌할 수 있단 말인가?

솔직히 이에 대한 좀 속 시원한 솔루션이 있다면 좋겠지만.. 나 스스로가 할 수 있는 부분은 크게 없다고 생각한다.

최근 몇년 새 사회적 분위기, 기업의 방향성, 사람들의 인식 등 많은 부분 바뀌고 있는 것을 보면

조금 더 나은 미래를, 앞날을 꿈꿔보지만..

연료 문제에 내가 어떤 목소리를 낼 것이며, 탈 것, 먹을 것 등등 이 거대한 사회의 구조 속에서 나는 뭘 더 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보겠다.

이 또한 너무 소극적일수는 있겠다.

 

 

 

<미세먼지라는 나쁜 표현>
먼지는 말 그대로 ‘가늘고 보드라운 티끌’을 의미한다. 자연스럽게 집에 쌓이는 것, 늘 함께 하는 것, 어쩔 수 없는 존재…. 문제의식이 전혀 담기지 않은 표현이다.

 

 

미세 먼지가 아니라 대기오염이라고 해야 한다.

그렇다. 나도 생각치 못했던 부분이다.

돌아보니, 나도 처음보다 많이 둔감해져있구나 싶다.

이와 함께 기후변화라는 말이 아니라 기후위기라고 해야 한다고 한다.

그렇다. 정말 자연스러운 변화의 과정이라 여기기 전에, 더 늦기 전에(이미 늦었을지 모르겠지만)

위기라고 느껴야 한다.

그렇게 자발적인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와야 한다.

 

 

 

 

이렇게 우리는 자꾸만 지구를 위한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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